220301 달 너머의 세계
세린은 저 위에 보름달이 휘영청 뜬 절벽에서 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서 있었다. 밤이었고 주위는 까맣기만 했다. 이미터 너머만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달빛은 자신과 좁은 주위 만을 비추고 있었다. 삶이 신비롭고 무서운 미지의 어둠과 달빛에 잠식되어 가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둠과 빛은 반대였지만 그녀가 두려운 기분으로 서 있자니 모두 비슷하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2학년인 그녀는 시험에서 예상 외의 낮은 성적을 받았다. 시험 기간에 이른 저녁 시간인 야자 시간부터 밤 12시까지 공부했던 그녀로서는 충격이었다. 그녀는 멍해진 머리로 가채점된 시험지를 받아들고 집까지 정신없이 왔다. 오는 길 주변의 아이들이 재잘거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세린은 집에 와서 가방을 던지고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침대에 얼마 동안 누워있었다. 이럴 리가 없다. 뭔가 잘못된 걸까? 그녀는 벌떡 일어나 가채점한 시험지를 꺼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문제를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울컥하고 목에 서서히 뭔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일단 부모님이 오기 전에 집을 나섰다.
시험 기간이라 일찍 끝나 푸른 하늘이 눈부셨다. 햇살이 따스하게 비쳤다. 꽤 산등성이에 있는 그녀의 집은 근처에 산이 있었는데 등산객이 많이 오고는 했다. 세린은 눈시울이 뜨거워짐과 동시에 부끄러워져서, 이 표정을 숨길 어디라도 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초반에는 격해지는 감정에 시야가 흐려지고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외진 곳을 찾아 헤맸는데, 제대로 안 보이는 상태에서 이동해서 그런지 길을 잃어버렸다. 몇 번을 봐도 똑같은 곳 같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고, 세린은 두려워졌다. 그러다 그녀는 어느 절벽이 있는 산봉우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다리는 떨어질 것 같이 아픈데다 숨은 차올랐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울려댔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완전히 밤이 된 주위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며 여지껏 서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이 더할 나위 없이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녀는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했다. 절벽 끝을 두려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린은 자꾸 시선을 끌어당기는 밝은 빛에 달을 쳐다보았다. 둥그렇고 커다란 달은 환히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피로에 눈을 감았다 떴다.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그런데 순간 달 근처에 어떤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치 사람 같은 그림자가...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음식을 못 먹어서 이상한 것이라도 보는 걸까? 하지만 이내 그림자는 점점 선명해졌다. 세린은 공포에 질려 바라보았다. 달과 세린 사이의 공중에 둥둥 뜬 그것은 어떤 성인 여자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귀신인가. 세린은 반쯤 경악해서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 분위기였다. 하얗고 눈이 작고 입술이 도톰한 여자였다. 옷은 하얀 티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단정해보이고 미소를 띄고 있었다. 목을 빼고 보니 얼굴도 뭔가 익숙했다.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거울에서 많이 보던 얼굴이었다.
자신이 조금 나이를 먹고 분위기가 조금만 더 부드러워진다면 그렇게 될 것 같았다. 홀린듯 입을 벌리고 여자를 바라보던 세린에게 여자가 다가왔다. 뒷걸음질 치는 그녀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성도 세린과 똑닮아 있었다.
"저 너머로 잠시 갔다 올 시간이야."
여자가 세린에게 팔을 내밀어 손을 잡았다. 화들짝 놀란 세린이 손을 내려다봤다. 당연히 차가울 것이라는 생각과 다르게 상당히 따뜻했다. 여자가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다녀오면 나아질 거야. 물론 바뀌는 건 없겠지만."
세린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세린을 조금은 슬픈 얼굴로 응시하다가 이내 웃었다.
"그러면 버틸 수 있겠지. 그래서 내 세계로 초대하는 거야."
세린은 마음이 홀린 듯 이끌리는 것을 느꼈다. 사위에 흩뿌려지는 하얀 달빛을 등져서 그늘이 진 얼굴을 보며 세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세린을 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잡고 멀리, 저 멀리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세린의 발 밑으로 불었다.
여자가 달의 너머를 지날 때, 세린이 본 것은 달이 순간 파란색으로 빛났다는 것이다.